제 개인적인 경험에서는 보통 국내에서 정부 과제, 스타트업 관련 프로그램 등을 진행할 때 심사위원이나 타사와 교류할 기회가 많이 없습니다. 강사 정보라면 모를까 심사위원 또는 참가자 정보가 사전에 공개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SBC 셀렉션 데이는 시작 전부터 심사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인원에 대한 정보가 공유되었습니다. 스타트업 뿐만 아니라 심사에 참여하는 100명이 넘는 심사위원의 상세 프로필, 연락처 등을 이메일로 받았습니다. 심사위원은 SBC와 함께 협업하는 대기업 팀, 동 프로그램 전기수, 스타트업 팀, 강사, 로펌, 발표 등 최종 선정된 스타트업에 도움을 중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습니다.

 

100명 심사 : 스타트업 경진대회인가 체력 경진대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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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마다 진행되는 1분 피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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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블 피칭 시간

심사는 이틀간 이뤄졌는데 진행 형태는 동일했습니다. 아침에는 먼저 심사위원들 앞에서 1분 피칭을 한 후 5인 1조로 이뤄진 심사위원 테이블을 돌며 각 테이블마다 20분씩 발표를 했습니다. 총 24개 테이블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이틀에 걸쳐서 했기 때문에 하루에 12개 테이블을 돌았습니다.

테이블 심사는 보통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습니다.

테이블에 처음 앉으면 5분간 스타트업과 심사위원이 서로 인사 및 소개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바로 회사 소개가 이어지는데 중요한 것은 발표 자료를 사용하지 않고 말로만 우리 회사의 사업을 소개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주어진 시간은 10분으로 그 이상을 넘어가면 심사위원 중 한 명이 멈춥니다. 사업 소개 후에는 15분간 자유롭게 Q&A가 진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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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들과 대화 형태로 진행되는 발표

이렇게 총 30분 동안 진행되는 심사를 하루에 12번을 연속으로 하게 되는데 자그마치 6시간을 이야기하는 꼴입니다. 처음 두 세 번은 긴장해서 하지만 나중에는 힘들어서 긴장감이고 뭐고 입이 자동으로 움직여졌습니다. 중간에 점심시간 30분이 있기는 하지만 이 시간에도 심사위원과 함께 하므로 쉴 새 없이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이게 스타트업 경진대회인지 체력 경진대회인지 헷갈릴 정도로 체력 소모가 엄청났습니다.

인사와 사업 소개는 반복되는 내용이라 하면 할수록 쉬워졌지만, 기술, 사업, 일상에 대한 Q&A 시간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특히나 이미 성공한 스타트업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경우에는 어려운 질문이 많았습니다.

왜 오큐파이를 만들었는지, 회사의 비전, 팀의 동기 부여는 어떻게 이뤄지는지, 로고 디자인을 어떻게 했는지, 한국 스타트업 현황, 왜 암스테르담에 왔는지 등 너무나 다양하고 많은 질문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간혹가다 심사위원들과의 핏이 좋지가 않아 일찍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두 번 정도뿐이었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Q&A 시간 15분이 부족할 정도로 질문이 많았습니다.

 

최종 선정 스타트업 발표

체력을 극한으로 시험하는 심사가 끝나고 이틀째 되는 날,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 최종 10개 팀 선정이 이뤄졌습니다. 결과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스타트업과 심사원들이 네트워킹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심사원들은 자유롭게 관심 가는 팀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나눴고 질문이 계속되었습니다. 심사원들은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선정된 스타트업과 함께 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기회는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결과가 나왔다는 공지와 함께 최종 선정된 스타트업의 이름이 하나씩 불렸습니다. 첫 번째, 두 번 째, 세 번 째… 아홉 번째 스타트업 이름이 불리는 동안에도 오니온파이브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지라며 걱정 반 기대 반 마음을 가지고 기다렸지만 오니온파이브는 끝내 불리지 않았습니다. 최종 선정된 11개의 팀은 강단 앞 무대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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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 선정된 11팀. 오니온파이브는 없습니다.

오니온파이브를 포함하여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팀들은 아쉬운 눈으로 선정된 팀을 바라보며 축하를 해줬습니다.

사업을 하면서 다양한 기회가 주어졌고 그 결과가 좋았든 나빴든 간에 큰 후회는 없었습니다. 최선을 다하면 되고 결과와 상관없이 그 과정이 중요하다고 항상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10개 팀에 포함되지 못한 그 순간만은 아쉬움이 매우 컸습니다. 당시 회사가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한 상황에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 우리가 가능성이 있는 회사라는 믿음이 약해졌던 순간이라 더더욱 선정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선정된 팀들을 축하해주고 이제 다시 SBC 본사로 이동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더 많이 내렸고, 버스에 타기 전 대표님과 밖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마치고 버스로 이동하려는 순간 저 멀리서 비를 뚫고 누군가가 저희를 부르며 다급하게 뛰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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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 그리고 반전

비를 맞으며 뛰어온 엘리자베스 매니저님은 버스에 막 오르려던 저희를 멈추고는 잠깐 이야기를 하자고 했습니다.

“결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아쉽지만, 우리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좋은 팀들도 워낙 많았고…”

“지금 오니온파이브 때문에 긴급회의가 이뤄지고 있어요.”

“네?”

엘리자베스 매니저님은 현재 상황을 급하게 설명해줬습니다. 오니온파이브가 평가 점수는 좋게 받았는데 여러 가지 걸리는 부분들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솔루션이 한국에서 서비스하고 있는데 유럽에서 서비스가 가능할지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점, 두 번 째 이번 SBC 프로그램은 핀테크와 보안 관련 스타트업을 위한 프로그램인데 여기에 오니 온 파이브가 잘 맞을지 모르겠다는 점이었습니다. 물론 프로그램 자체가 AI도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메인은 핀테크와 보안이다 보니 SBC에서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서비스 가능 여부는 사실 굉장히 복잡한 문제였습니다. SaaS이기 때문에 유럽에서 이용하는 것도 큰 문제는 없었지만, 유럽의 보안 정책인 GDPR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매니저님은 지금 오니온파이브 때문에 회의가 진행 중인데 GDPR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프로그램 분야와 100% 안 맞는 부분을 감수한다면 12번째 팀으로 선정될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저와 대표님은 다시 또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심사가 끝나고 느낀 점

민간이 주도하는 유럽 스타트업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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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도하에 운영되는 국내 유사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와는 달리 SBC는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원도 없이 대기업 파트너와의 관계를 통해 자체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유럽에서는 로비오(앵그리버드 개발), 슈퍼셀(클래시 오브 클랜 개발) 등과 같은 성공적인 스타트업의 등장으로 신사업에 대한 대기업의 관심이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이로 인해 대기업 스스로가 스타트업과의 연계를 통해 신사업을 발굴하고 성장의 원동력을 찾기 위해 내외부적으로 스타업과의 협업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 또한 스타트업인 SBC는 자원이 부족한 스타트업과 신사업에 대한 관심이 높은 두 주체를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으로 연결해주는, 스타트업과 대기업 간의 중간 다리 역할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PGGM, Rabobank, Capgemini, ING 등과 같은 유수의 유럽 대기업이 SBC 파트너사로 프로그램에 상시 거주하면서 멘토링, 사업화, 컨설팅 등 다양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스타트업과 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네덜란드 정부가 모든 것을 대기업에만 맡겨두는 것은 아닙니다. 스타트업 세금감면, 고용비자 기준 완화 등과 같은 간접적 지원과 암스테르담의 지리적 / 사회적 강점을 활용하여 암스테르담을 유럽의 스타트업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아닌 팀

SBC에서는 심사 전부터 심사위원들에게 아이디어, 사업, 비즈니스 모델이 등이 아닌 팀을 중심으로 평가를 하라고 강조를 했습니다.

국내에서는 사업 및 아이디어 실현 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평가와 Q&A가 일반적인데 SBC에서는 어떻게 만들지보다는 누가 만들려고 하는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헀습니다.

이와 같은 평가 기준은 사전에 제출 서류하는 서류에도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특허, 기술 도면, 사업계획서 등과 같은 서류가 아닌 1~2pg 분량의 사업계획서만 요구하고 흥미롭게도 공동자 간 계약 및 협의서와 인·적성검사를 요구했습니다.

공동창업계약서는 공동창업자 간 향후 분쟁 방지를 위해서였고 인적성검사는 팀원 간의 조합 그리고 팀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기서 가장 흥미로웠던 인·적성검사는 자가 테스트로 진행되었고 공동창업자 또는 주요 창업 멤버 간의 조화를 보기 위해 전원이 참여해야 했습니다. 인·적성검사를 통해 팀원 간의 핏(fit) 점수를 확인하고 심사가 끝난 후에는 이에 대해 피드백도 해주었습니다. 팀에 대한 검증과 평가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느껴지는 부분이었습니다.

 

스타트업 발표 : 더 긴 여정의 시작

오니온파이브는 결국 2018년 11월 SBC 암스테르담에 입주했습니다. 물론 전사가 암스테르담으로 옮긴 것은 아니고 영어가 가능한 저와 개발자 한 분만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선정 되었는데 선정과정은 앞으로 있을 3개월이라는 긴 여정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이어질 스타트업 발표의 재앙 시리즈는 암스테르담에서의 3개월과 마지막 데모데이까지의 이야기를 담을 예정입니다. 유럽 액셀러레이터와 스타트업 프로그램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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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 발표의 재앙 이전 시리즈 다시 보기

1편 : 뜻밖의 피칭 데이 보기→ 
2편 : 미비한 준비의 폐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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